이 언어와 논리와 생각은 서로 연결되어있죠. 왜냐하면 이 논리라고 하는 것은 우리의 사고를 체계화 시키는 하나의 사고에 질서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논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과연 완전한가? 우리는 어떻게 논리성을 검증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래서 이 추론과 논증체계를 어떻게 확고부동하게 이끌어갈 수 있을까 언어와 논리는 완전한가? 연역/귀납/변증/역설. 이러한 4가지 논리체계, 4가지 논리구조 크게 서양의 논리학을 형성하는 4가지 논리의 분야를 헬레니즘이 형성하고 있죠. 그리고 이 논리학에 흐름과 철학의 흐름은 이 4가지 논리의 분야를 벗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논증과정이 존재하는데 이 4가지 중에 어떤 하나도 완전하진 않습니다. 그래서 각각의 논리는 각각의 논증은 서로 다른 것에 도움을 필요로 하죠. 자기 스스로는 불완전합니다. 연역은 귀납을 필요로 하고 변증은 역설을 필요로 하고 역설도 마찬가지죠. 흑백논리= 역설적 논리의 한계
연역의 장점은 뭘까요 숲 전체를 볼 수 있어요. 그러면 귀납의 장점은 뭘까요. 구체적으로 자세하게 볼 수 있어요. 나무를 그렇다면 둘의 한계는 뭘까요. 숲을 보는 순간 나무를 보는 것을 포기해야 돼요. 나무를 보는 순간 숲 전체를 보려는 욕심을 버려야 돼요. 이것이 바로 우리의 삶에 한계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논리의 한계입니다.
귀납의 한계?=예를들면 지금 나는 건강하다. 힘이 넘친다. 그리고 나는 영원히 살 것이다. 그러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릴 수가 없죠.
또 하나의 예를 들겠습니다. 착한 사람은 행동이 바르다. 일리있는 얘기죠. 인간은 착하다. 착한사람은 행동이 바르다. 물론 가능성 있는 얘깁니다. 연역적으로는 가능성이 있을 수가 있죠. 그런데 착한행동을 하는 것을 보니까 그 사람이 착하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죠. 어 그런데 제가 요즘에 제가 세상 사는 사람들을 많이 보니까 오히려 남들보다 훨씬 더 착한 사람들 너무나 선해 보이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믿어서 제가 후회한 적도 많이 있습니다. 착한 성품이 착한 행동을 만들어 내는 것은 당연하지만 착한 행동을 통해서 전체적인 착한 성품으로 올라갈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죠. 왜 그럴까요. 이게 바로 개체의 한계입니다. 귀납의 한계죠. ,
대표적인 연역의 오류가 어디있을까요. 저는 데카르트에서 그것을 발견했습니다.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가 있죠.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 이 내가 생각한다고 하는 명제, 이 명제를 데카르트는 이 세상에서 가장 절대적인 명제로서 인정 했습니다. 근데 만일 그 명제가 참되다면 데카르트의 논리체계는 완전하고 건실하다고 볼 수 있죠. 그런데 내가 생각 한다고 하는 것. 그것이 과연 확실 할까요?
단 버그마이어 부인의 경우는 제외하고. 이것이 바로 규범의 한계죠. 연역의 한계고 절대주의의 한계입니다. 쉽네 말하면 이세상 어떤 상황과 조건속에도 다 적용할 수 있는 절대적인 규범은 존재하지 않다는 것이죠.
연속성, 독립성, 엘레강스(미적인 차원)
수사학에 3가지 요소를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고 했냐면 첫 번째가 로고스 ,두 번째가 에토스, 세 번째가 파토스. 자 로고스 무엇일까요. 논리죠. 말에는 논리가 있어야 된다.
두 번째는 뭘까요. 에토스는 뭘까요. 성품이에요. 덕이에요 덕. 사람이 말만 잘해서가 아니라. 그 말 속에는 덕이 담겨 있어야하는 거예요. 그래야 진정한 논리가 완성된다는 거예요.
세 번째는 뭘까요. 파토스, 감성이에요.
진, 선, 미 감성의 세계가 미의 세계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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