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주 차 생각을 생각하기
생각을 생각한다는 칸트 사상. 주체의 주관적인 인식 작용. 칸트의 선배들인 스피노자, 데카르트, 베이컨처럼 크게 볼 땐 이성중심주의, 인간중심주의 계몽주의 전통 안에 있다고 볼 수 있음. 그래서 사람들이 인식론적 관점에서 칸트와 데카르트를 보는데 이건 오해! 매우 다름.
데카르트도 주체와 객체와의 관계를 이미 존재했음. //근데 중세시대 주체와 객체는 아직 분리되지 않았었음. 하나로 되어있음. 왕의 중심으로 모두가 연합되어 하나가 돼있었음. 개인주의가 르네상스 이성, 인간 중심주의, 헬레니즘 부활하고 주체 객체를 하나로 모았던 사고를 갖다버림. > 주관과 객관이 분리됨.
베이컨과 데카르트의 공언은 주관과 객관을 분리시켰다는 것. 과거에는 주관=객관=주관인줄 알았음. 이제 주관 분리시키고 객관을 더 의식하게 됨. 그런데 베이컨 데카르트는 주관과 객관 사이에 긴밀한 관계성 객관적인 지식이 주관 안으로 들어오고 또 주관은 객관적인 것을 이해하고 상호작용한다고 전제했음. 분리시킨 게 아님, 관계성 인정함.
but, 칸트는 이둘을 철저히 분리시킴, 심지어 객관을 제거 함. 이 객관이란 게 대상임. (=객체, 세상, 물질, 자연이고 세계(피지스), 대상 세계를 전제하는 말) 경험과 관찰을 중시. 물리학(과학)을 칸트는 철저히 거부. 피지스의 세계가 관심인 것이 아니라 피지스의 세계를 관찰하는 그 관찰. 그것을 이해하는 이성. 그것이 칸트에게는 유일한 현실이고 그것이 하나의 학문의 대상이었음. 바로 피노메나(phenomena)라고 하는 것. 객체를 거부. 내가 지금 보고 듣고 살아가는 이런 확실한 경험적인 현실을 완전히 거부함. 피지스의 세계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기에 알 필요도 없다. 칸트에게 있어서 철학에 대상은 더 이상 내 밖에 있는 대상 세계가 아님. 그것은 인간이 알 수도 없고 알 필요도 없다. 그에 유일한 대상은 페노메나의 세계 .
지금까지 인간의 이성이 그 이성 자체가 철학의 대상이 되었음. 그래서 칸트는 대상 세계에 관심이 없음. 지금 내 안에서의 상호작용이 어떻게 움직이는 것을 분석하고 파악하는 것이 철학의 대상이라고 함. 어떻게 보면 플라톤이 다시 재연되는 걸 수도 있음, 플라톤 : 지식은 밖에서 나에게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지식은 회상하는 것이다. 지식은 밖이 아니고 안에 있다. 플라톤의 재연이라 볼 수 있음.
근데 칸트의 스승은 루소임. 루소[에밀]는 칸트의 순수 이성 비판,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의 기초가 되었음.
칸트는 계몽주의를 확립하고 집대성한 사람이라 볼 수 있음. 르네상스가 계몽주의의 시발점. 신 중심주의적인 세계관이 지배하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인간중심주의 이성중심주의적인 시대, 합리성이 지배하던 시대가 떠오른다고 하는 것은 시대적인 변화이고 그 출발점이 계몽주의임. 그 계몽의 중심인 이성을 칸트가 철저하게 분석 시작해서 칸트가 계몽주의의 절정에 서있는 것.
3가지 질문을 통한 분석을 함( 이성을 분석하는 거) 1. 나는 무엇을 알 수 있는가. 데카르트가 던졌던 질문이지만 칸트는 밖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해 던짐, 소크라테스, 데카르트와의 다른 점은 이성이라는 것이 밖의 어떤 것과 연결되어서 무엇인가 얘기하는 게 아니라 밖에 있는 것이 연결되기 전부터 이성이 먼저 것을 알고 있다는 것. 칸트의 이성은 경험과 연결되기 전에 경험을 통해서 형성된 게 아니라 거꾸로 되어있음 이성이 먼저 있음. 선험이라고 함 선험= 경험을 넘어서 있는 것. 경험하지 않고 알고 잇다, 대상 세계와 독립되어서 이미 내 안에 완성되어 있다는 것.
2번째 질문 무엇을 해야 하는가, (실천이성 비판). 칸트는 인간이 뭘 할 때 누가 뭘 하라고 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내 안에 태어나서부터 내 안에 뭘 해야 하는 건지 이미 다 입력되어 있다는 것. 실천 이성도 선험적인 거임. 무엇이 올바른지 , 좋고 나쁜지 안다는 것.
정언명령 (Categorical Imperative) 우리는 베이컨이 말했던 이 우상에서 벗어나야 함, 시장의 우상. 그냥 정언명령이라는 것 인간의 마음속에는 정언명령이 존재함 양심의 소리가 울려 퍼진다는 것. 그것이 인간에게 행동을 일으킨다는 것. 이게 바로 선한 의지. 칸트는 실천이성비판에서 이 내용을 씀. 무엇을 해야 하는가? 질문이 뭐예요? 정언명령을 따라서 행동하라,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된다. 칸트가 말하는 신은 밖에 있는 신이 아님, 내 안에 있는 신. 신의 현존, 영혼불멸, 어떤 신이라고 하는 절대적인 것이 내 안에서 올바른 가치를 결정해줘야 한다는 것.
(판단력 비판)이 공간도 내가 만들어 낸 게 아니에요. 다만 내가 시간 속에 들어와 있고 공간 속에 들어와 있을 뿐이지. 그런데 칸트가 지금까지의 철학의 흐름과 사상의 흐름과 완전히 구별되는 결정적인 근거가 여기 있음. 그래서 칸트의 사상을 코페르니쿠스적인 회귀 /시간과 공간이라고 하는 것이 내 밖에 있는 객관적인 실체가 아니고 내 안에 있다는 것.
감성은 이 시기가 틀, 사고의 틀, 이성의 틀을 형성하는 용기와 같다
순간적 판단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판단이 지속성을 갖기 위해선 공간이 지속성 있어야 한다. 칸트는 이성의 틀 속에서 영혼불멸을 설명함. 감성의 영역 속에서 시간이 무한히 확장됐을 때 , 그 시간과 공간의 판단이 명확할 수 있다. 확실한 무한한 공간과 시간을 얻게 되면 나의 선험적인 이성이 완전한 이해와 확실성을 나에게 줄 수 있다고 하는 것. 그래서 칸트는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신이 존재한다는 중요하지 않고, 신이 필요하다.
오성은 12 범위, 12 범주 안 4개의 카테고리가 있다. 양적인 부분 /질적인 부분/ 관계적 분분/양상적인 부분.
칸트에게 있어서 도덕이라 하는 것이 외부적인 규범이 아닌 선한 의지 =도덕이라고 하는 것
칸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율성. 순수 이성 비판 , 실천이성비판, 판단력 비판을 통해서 우리에게 설명해주고 있는 것은 우리 안에 내재되어 있는 자율성을 강조한 것. 실천이성 칸트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선한 의지. 근데 이게 선한 의지가 너무 절대적이라 비판 받음. 왜냐 모두가 선험적으로 선한의 지를 갖고 있음
칸트 사상 종합, 인간의 상호작용과 이해 작용이 선험적인 것, 인간이 행동하고 실천하고 삶을 살아가는 모든 원리가 인간 안에 내제해 있다. 판단력은 무엇이냐 어떤 가치가 밖에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내 안에 내제해 있다.
이제 칸트 강이 형성된거임 이제 비칸트주의란 칸트주의로 나눠짐 , 칸트주의= 신칸트학파= 계몽주의의 전통= 모더니즘>>>>>> 포스트모더니즘
제가 썼지만 진짜 못 알아먹겠네요..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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